AI 작곡, ‘표절’과 ‘창작’의 아슬아슬한 경계 (K팝 만들기 실험기)
AI 작곡, ‘표절’과 ‘창작’의 아슬아슬한 경계 (K팝 만들기 실험기)
“뉴진스 스타일의 몽환적이고 듣기 편한 K팝을 만들어줘. 여성 보컬, 로파이 드럼 비트, 신스 패드 사운드를 사용하고, 후렴구는 중독성 있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요구는 최고의 작곡가와 프로듀서 팀에게나 가능한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2025년 오늘 저는 이 문장을 AI 작곡 프로그램 ‘Suno’의 프롬프트 창에 입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 1분 뒤 제 스피커에서는 정말로 그럴듯한 K팝 스타일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AI가 만든 이 노래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 감탄의 이면에는 씁쓸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 뒤따릅니다. 과연 이 노래는 ‘창작’일까요 아니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K팝을 교묘하게 짜깁기한 ‘표절’일까요? 오늘 이 글은 제가 직접 AI 작곡 툴을 이용해 한 곡의 노래를 만들어보는 전 과정을 기록하며 기술의 발전이 우리에게 던진 ‘AI 음악 표절’과 ‘인공지능 창작’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실험의 시작: AI에게 ‘뉴진스 스타일’을 주문하다
실험은 간단했습니다. 현재 가장 뛰어난 AI 작곡 툴 중 하나로 평가받는 Suno에 접속하여 서두에 언급한 구체적인 프롬프트를 입력했습니다. AI는 몇십 초의 분석 끝에 1분 30초 분량의 노래 두 곡을 완성했습니다.
결과물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몽환적인 신스 사운드, 미니멀한 리듬 구성, 자연스러운 여성 보컬의 멜로디 라인은 누가 들어도 특정 걸그룹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기술의 발전에 대한 감탄도 잠시, 제 머릿속에는 서늘한 의문이 피어올랐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물론 특정 멜로디나 가사를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 코드 진행 방식, 보컬의 창법까지, 그 스타일의 ‘정수’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모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AI 음악 표절 논란의 핵심입니다.
2. 유령의 정체: AI는 어떻게 ‘표절 같은 창작’을 하는가?
이 ‘데자뷔’ 현상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AI의 작동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AI 작곡 모델은 인간처럼 영감을 받아 창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AI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기존 음악 데이터, 즉 저작권이 있는 수많은 노래를 ‘학습’합니다.
그리고 ‘뉴진스 스타일’이라는 프롬프트를 받으면, 학습된 데이터 속에서 해당 스타일의 음악들이 가진 통계적, 수학적 패턴(예: 자주 사용되는 코드 진행, 리듬, 악기 구성)을 분석하여, 그 패턴과 가장 유사한 새로운 데이터 조합을 ‘생성’해내는 것입니다.
즉, AI는 ‘창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의 그림자를 조합하여 가장 그럴듯한 ‘재현’을 해내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원곡의 멜로디 라인이나 구조와 매우 유사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으며, 이는 법적인 음악 저작권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현재 소니 뮤직과 같은 거대 음반사들이 AI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창작자의 역할 재정의: ‘작곡가’에서 ‘디지털 DJ’로
그렇다면 AI로 음악을 만드는 것은 모두 비윤리적인 표절 행위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 여기에는 창작자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가 필요합니다. AI 시대의 창작자는 더 이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곡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AI가 쏟아내는 무한한 소리의 파편들 속에서 독창적인 조각을 골라내어 새로운 맥락으로 재조합하는 ‘디지털 DJ’ 혹은 ‘프로듀서’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인공지능 창작’ 워크플로우를 제안합니다.
- 샘플링 (Sampling): AI를 ‘영감의 도서관’으로 활용하라. AI에게 완성된 곡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는 대신, “몽환적인 신스 코드 진행 4마디”, “미니멀한 로파이 드럼 루프”, “속삭이는 듯한 여성 보컬 멜로디 라인”처럼, 곡의 ‘재료’가 될 짧은 파편들을 수십, 수백 개 생성하도록 지시합니다. 이때 생성된 결과물들은 ‘완성된 곡’이 아닌, DJ가 LP판에서 발췌하는 ‘샘플’과 같습니다.
- 큐레이션 (Curation): 인간의 ‘취향’으로 옥석을 가려라. AI가 생성한 수많은 샘플들 중에서, 기존의 어떤 곡과도 유사하지 않은, 가장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조각들만을 ‘선택’합니다. 이 ‘선택’의 과정이야말로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취향과 안목이 개입되는 가장 중요한 창작 행위입니다.
- 재구성 (Recomposition): 나의 ‘창의력’으로 재조립하라. 선택된 AI의 ‘샘플’들을 에이블톤 라이브나 로직 프로와 같은 전문 작곡 프로그램(DAW)으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만의 오리지널 멜로디를 더하고, 코드 진행을 변형시키며, 완전히 새로운 구조로 곡을 ‘재구성’합니다. 이 단계에서 AI는 더 이상 공동 작곡가가 아닌, 나의 창작을 돕는 하나의 ‘악기’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우리는 AI 음악 표절의 굴레에서 벗어나, AI를 활용한 진정한 ‘나의 창작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결론: AI는 질문을 던질 뿐, 답은 인간에게 있다
AI 작곡 기술은 우리에게 ‘창작이란 무엇인가?’, ‘오리지널리티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AI가 만든 K팝 스타일 음악은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이자 ‘위험한 재료’입니다.
이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여 손쉬운 모방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수고를 통해 새로운 창작의 길을 갈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서, AI 시대의 진정한 크리에이터의 가치가 결정될 것입니다. AI는 우리에게 무한한 음표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음표로 어떤 음악을 완성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의 몫이다.